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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 2015.02.07 07:05 조회 수 : 708




18세기 조선 세시풍속을  소개한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는 서울 성곽 따라 봄꽃 놀이를 하는 얘기가 실려 있다. 필운대 살구꽃, 북둔 복사꽃, 동대문 밖 버드나무, 서대문밖 천연정 연꽃이  최고 이니, 서울 성곽 40 리를 하루 동안 돌면서 꽃과 버들을 구경한 사람을 장안 제일의 한량으로 쳐주었다 한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고 뒷동산이 되겠고, 북둔이라 함은 성북동 일대를, 천연정은 돈의문을 나서 경기 감영(적십자병원)을 지나 현재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서지(서쪽 연못) 정자를 일컫는다. 옛 모습과 나무들은 바뀌었어도 그 풍류는 절절이 느껴진다.


그럼, 동대문 밖에는 왜 버드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을까?


평소 건천이었다가 장마가 지면 토사가 밀려와 홍수가 나기 마련이었던 청계천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개천 바닥을 파내는 준천 사업을 수시로 벌여야만 하였다. 특히 영조 대에는 이런 준설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청계천 광통교 교각에 새겨진 문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 본인의 가장 중요한 치적 중 하나로 내세울 정도였다.

이 때 개천 바닥에서 파낸 흙들이 모여 동산을 이루게 되니, 현재 중구 주교동에 있는 방산시장 이름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젠 향기로운 산으로 의미는 바뀌었지만.... 흙산이 다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명력이 강한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산비탈 사방 공사를 한 셈이다. 이렇게 심어진 버드나무는 어디나 잘 자라는 생명력 덕분에 큰 군락을 이루었음을 당시  고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양도성도_4764.jpg 한양도성도 조선 후기 서울의 모습을 그린 전형적인 회화식 지도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동대문 부근에 그려진 버드나무이다.


 

이처럼 늘 홍수의 위험이 있는 개천 변에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살게 마련이고, 이들의 중요한 생업의 대상이 되게 된 것 또한 주변에 흔한 버드나무였다. 키버들 줄기를 엮어 각종 그릇인 고리짝을 만들기도 하고, 취병이라 하여 칸막이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남들이 꺼리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니, 고려 시대로부터 이런 수공업이나 도살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버드나무 뜻인 양수(揚水)를 쓴 ‘양수척’이 천민을 통칭하게 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버드나무가 우리 생활 속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지를 이를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겠다.
 또한, 버드나무하면 생각나는 게 이명래 고약이다. 각종 종기에는 만병통치약처럼 쓰였는데 지금은 위생 상태가 좋아선지 예전만큼 인기가 없는 이 고약을 다지는데 독성이 없는 버드나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버드나무 껍질은 천연진통제로도 효용이 있어 아스피린의 원료가 되기도 했다.


취병IMG_4494.jpg 부용지에 설치된 취병. 고리 버들처럼 사철 푸른 나무를 이용해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칸막이로 사용한 전통 방법이다.


일찍 싹을 틔워 봄을 상징


갈잎 큰 키 버드나무의 학명은 크게 버드나무 속의 살릭스와 사시나무 속의 포푸루스로 나뉜다. 그 종류는 우리나라에만 30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 강가에 살아서 붙여진 갯버들은 뿌리에서 많은 줄기가 뻗어 나온다. 잎보다 먼저 꽃을 피는 암수딴그루로 기다란 꽃 이삭 때문에 흔히 버들강아지라 부른다. 숫나무에서는 노란색 꽃가루가 터져 나오고, 암나무에 달리는 종자는 흰 솜털로 둘러싸여 있다가 4월 하순경이 되면 눈처럼 흰 버드나무 씨앗이 곳곳에 흩날리게 된다. 한 때  이렇게 바람에 날리는 씨앗을 꽃가루로 오해하고 알레르기의 원인이라고 잘못 알려져, 버드나무와 포플러가 큰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종자를 멀리 확산시키는 진화된 식물 기관일 뿐, 다른 식물의 꽃가루처럼 알레르기를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한다.

청계천변엔 2월말부터 뽀송한 털을 감싼 꽃봉오리들이 피어오르며 봄을 재촉하곤 한다. 봄이 오는 길목을 지키며 우리를 봄 길로 안내해 주고 있다.


갯버들GR844399.jpg 이른 봄 청계천의 겨울을 깨우는 갯버들


버들가지가 왜 성글까


“버들가지 머리 푼 봄날, 해오라기 한 마리, 떠나는 돛배를 망연히 바라본다.”

예로부터 시인이나 화가가 즐기는 소재가 되었던 버드나무는 절양(絶陽-버드나무를 꺾음)이라 하여 이별을 뜻하곤 하였다. 거꾸로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는 버들이기에 ‘ 봄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날처럼 여겨 달라’며 헤어짐의 아쉬움을 담곤 했던 것이다. 그래선지 임 보내는 포구엔 버드나무가 있게 마련이고, 버들잎 또한 수난을 당해 남아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한강에서 배를 타고 떠나갈 임이 없고 버들가지를 이별 선물로 주고받을 일도 없다.

덕분에  풍성하게 꽃을 피워내고 있는 능수버들은 좋은 시절을 만났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우리 네 삶이 옛 사람들의 멋진 헤어짐의 비유를 잊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오는 봄, 임 오시 듯 기쁜 마음으로 한강변으로 마중 나가봐야겠다.



능수버들GR845439.jpg

 한강변에 꽃을 활짝 핀 능수버들